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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돌봄] 나의 예민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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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22-07-2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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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민함의 역사

- 류시화

유전인자 속에 예민한 염색체를 열 개쯤 갖고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말할 수 없이 예민했다. 겉보기에는 다른 아이들과 별 차이 없었으나 내면은 비정상적으로 과민했다.
무엇보다 소리와 냄새에 민감했다. 산골 마을에 살면서 작은 부스럭거림에도 잠이 깨어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한번은 어둠이 빛날 정도로 달이 밝았는데, 기척에 눈이 떠져 툇마루로 나가니 내 키 두세 배 되는 동물이 마당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부드럽게 꼬리를 흔들었다.
얼마나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정체 모를 동물은 홀연히 사라지고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울었다. 어린 자아였지만 자신의 예민함이 버거웠을까?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아직 살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예감이 엄습하는.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그 일은 혼자만의 비밀로 남았다. 예민함은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더 깊어진다. 관계의 갈등은 예민함과 둔감함의 부딪침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부서지는 것은 언제나 예민한 쪽이며, 부서지면서 더 예민해진다. 학교 생활 기록부에는 ‘타의 모범’으로 적혔으나 인생 기록부에는 ‘너무 예민해서 탈!’이 칸마다 채워졌다.
소리보다 심각한 문제는 냄새였다. 모든 냄새가 후각신경을 자극하고, 고문하고, 물어뜯었다. 유명한 사건인데, 저녁에 함께 학교 숙제를 하러 온 친구의 입에서 풍기는 생멸치 냄새에 경기를 일으키며 기절한 적도 있다. 그 친구는 그 후 최소 3미터 거리를 두고 함께 숙제를 하도록 어머니의 단속을 받았지만, 잘못은 생멸치 몇 마리(정확히는 5마리) 훔쳐먹은 그가 아니라 다른 행성으로 가다가 대기권 아래 냄새 가득한 지구에 불시착한 나에게 있었다. 예민한 신경으로 인해 ‘머리 아파.’가 나의 만트라였으며, 극심한 두통으로 고등학교 때는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이쯤에서 예민한 독자라면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인도 여행을 어떻게 할 수 있었지?’
인도 땅에서 태어난 싯다르타가 6년 고행 끝에 깨달은 첫 번째 진리는 ‘인생은 괴로움(두카)’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극도로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였을까? 나의 첫 인도 여행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인도는 나에게 영적 깨달음의 나라가 아니라 소리와 냄새의 난장판이었다. 별의별 소음이 거리마다 넘쳐나고, 온갖 희한한 냄새가 골목과 게스트하우스와 기차 안에 모여 있다가 후각신경을 찔러 댔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내가 받는 고통을 일기에 적었는데, 밤낮으로 소음과 냄새를 일으키는 장소와 사람들(특히 빤 씨ㅂ은 붉은색 침을 시종일관 입에 물고 있는 아저씨들)과 동물들(밤새 짖어 대는 길거리 개들)과 심지어 물건에까지 적대적이 되어 갔다. 수면 장애와 두통으로 미치기 직전까지 간 어느 날, 나는 일기에 썼다.
‘이 소음들과 냄새를 초월하지 못하면 나의 꿈이자 생의 희망인 인도 여행은 불가능하다.’
그 문장을 적고 나서 나 스스로 놀랐고, 그것이 나를 깨어나게 했다. 그 후 나는 예민함의 방향을 바꾸었다. 소음들 속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치유의 힘을 가진 향기들에 집중했다. 그렇게 나는 진정한 만트라 명상을 알게 되었고, 영혼에 와닿는 인도 클래식 음악에 귀를 열었으며, 다양한 아열대 꽃에서 채취한 아로마 오일(특히 벨라풀 오일!)에 눈떴다. 또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사람, 선한 사람, 영적 깊이를 가진 존재들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내 인도 여행의 성공 비결은 바로 나의 예민함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말처럼. 이제 내가 언제나 그리워하는 것은 인도 공항과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밀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냄새의 향연들이니, 그것들 속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보석들은 예민하게 깨어 있는 눈에 자신을 드러낸다.
예민한 사람은 부정적이 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성향이라면 당신은 예민한 염색체를 열 개쯤 가진 사람이 분명하다. 그 예민함은 신이 당신에게만 준 능력이다. 당신은 그 신비를 안고 세상에 왔다.
예민한 신경과 격렬한 영혼을 가진 당신, 둔감한 염색체를 스무 개쯤 가진 사람들에 둘러싸여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이때 당신이 할 일은 그들과 싸우거나 그들의 염색체를 예민하게 개조하려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삶 속에 뛰어들지 않으려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할 일은 예민함을 승화시켜 아름답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 나가는 일이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운명처럼 당신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신 앞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의 예민한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라고.

artwork_ANDRÉ DA LOBA


(출처: 시인 류시화 페이스북 페이지)